창작소설

(연재1) 정의가 침묵한 밤 – 프롤로그 & 침묵의 법복

쓰리앤투 2025. 6. 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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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새벽 여섯 시, 도시의 심장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회색빛 콘크리트 위를 묵묵히 달렸다. 아직 세상이 눈을 뜨기 전, 그는 스스로의 질서를 되새기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날, 낡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웅크려 있던 노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시선엔 분명한 갈망이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넸다.“이걸로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드세요.”

 

그 순간은 지나갔다. 평범한 하루의 일부분처럼.

 

하지만 며칠 후, 그는 법정에서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살인 혐의로 피의자석에 앉아 있는 남자. 그는 기억했다.

 

그날 아침, 침묵 속에서 돈을 건네받던 그 눈빛을.

 

그 순간, 법복 안에 숨겨둔 그의 신념이 흔들렸다.정의는 무엇인가.

 

법이 옳은가, 옳음이 법인가.


- 침묵의 법복

 서른다섯에서 마흔 즈음의 남자였다. 낡은 시계처럼 정확하고, 무표정한 회색 도시에 녹아든 듯한 생활을 이어가는 사내. 습관은 철저했고, 일상은 기계 같았다. 그러나 그 속엔 쉽게 읽히지 않는 깊이와, 말없이 무게를 견디는 자의 고요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매일 아침 여섯 시, 잠든 도시를 뚫고 달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회색빛 콘크리트를 묵묵히 내디뎠다. 185cm의 키에 꾸준한 웨이트와 달리기로 다져진 단단한 몸. 군인은 아니었지만, 군인처럼 단정했다.

 

 직업은 판사였다. 법정에 앉아 조용히 망치를 두드렸다. 성범죄, 음주운전, 강도, 폭행, 사기, 살인. 매일같이 배당되는 사건들은 마치 잿빛 파편 같았다. 어떤 피의자들은 깊은 후회의 흔적을 얼굴에 지녔고, 어떤 이들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재판장을 응시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상처 입은 피해자들이 법정 안을 채웠다. 고통은 증거가 되었고, 눈물은 진술이 되었다. 하지만 그 잔혹한 장면조차 어느새 일상의 소음처럼 희미해졌다. 삶과 범죄는 무감각한 파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일을 했다. 정의를 사랑해서도, 법을 신념으로 여겨서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고, 사회는 우러러보았으며, 높은 연봉과 법복 하나로 조용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정을 나서면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침엔 뉴스를 보며 밥을 먹었고, 퇴근 후엔 늘 가던 헬스장에 들러 묵직한 바벨을 들어 올렸다. 팔과 어깨가 타오를 때쯤, 쇠가 부딪히는 둔탁한 금속음이 천장을 울렸다. 땀과 철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하루의 긴장을 서서히 벗겨냈다.

 

 때때로 오래된 친구들과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모든 게 단정하고 평온했다. 법복을 벗은 그는,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한 일상 속 남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인간의 거짓을 꿰뚫는 직관, 말보다 빠르게 진실을 감지하는 감각을 타고났다.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 침묵 사이의 망설임,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불안감. 그런 신호들을 잡아내는 데 능숙했다.

 

 그 능력들은 그를 유능한 판사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사회에 대한 회의를 깊게 만들었다. 누구나 거짓을 입고, 진실은 늘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매일매일 사회의 소음이 들렸다. 라디오에서는 언제나 비슷한 목소리로 비극이 흘러나왔다. 도심에서 발생한 이유 없는 사건들, 정치인의 횡령 혐의, 어린이 보호시설의 사건들. TV에선 연예인의 스캔들이 폭로되고, 총격 사건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자극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질식해 가고 있었다. 세상은 부조리와 허위로 범벅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그는 말없이 냉담해져갔다.

 

 사람들은 믿음을 말하며 입을 모았다. 신을 섬기고 진실과 선함을 이야기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믿음은 값비싼 상품이 되었고, 경건은 권력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그는 매일 법정에서 그런 현실을 마주했다. 갈등의 끝엔 늘 피해자가 있었고, 그 피해자와 피고의 얼굴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판결을 마친 후, 조용히 판결문을 덮었다. 정적 속에서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창밖 풍경은 평범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으로 바삐 흘러갔다.

 

 그는 조용히 다시 한 번 커피를 삼켰다. 이름 없는 불안이 그림자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그렇게 믿고 있던 법과 정의는 과연 옳은가.

 

판사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의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이 세상의 기준은 왜 이토록 흔들리는가.

 

- 프롤로그와 첫 번째 이야기는 ‘정의’와 ‘인간의 본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깊이 있게 예고합니다. 침묵 속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갈등과 사회적 모순이 잘 드러나는 서사입니다.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