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평소처럼 체육관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도시의 그림자는 천천히 늘어지고, 바람 끝엔 하루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골목 어귀, 한 사람의 실루엣이 멈춰 서 있었다. 바로 그날, 군중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맞고 있던 남자였다.
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깊숙이, 눈은 허공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향했고, 입술이 먼저 열렸다.
“그날 떨어진 돈, 어디 갔습니까.”
고개를 천천히 든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낮게 대답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집어갔다고, 자신은 몇 장밖에 건지지 못했다고. 그의 말은 짧았고, 무표정한 얼굴에는 감정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더는 시선도, 말도 주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 뒷모습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따라붙었다.
아침 출근길. 그가 평소 지나치던 길목에 우뚝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눈을 가린 천, 손에 들린 칼과 저울.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의 상징.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눈가리개는 정말 공정함의 상징일까. 보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시가 된 것은 아닐까. 칼은 힘 있는 자를 향하지 않았고, 저울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의해 기울어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정의라는 단어는 반복되지만, 그 무게는 늘 ‘조절’되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그 조절은 대부분 힘이 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날 오후, 그는 오래된 사건 하나를 다시 펼쳤다. 음주운전과 뺑소니. 흔히 접하던 유형의 사건. 피의자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사진을 본 순간, 기억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재판 중 피해자의 남편으로 앉아 있던 남자. 울음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외침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수척했고, 말은 없었으며, 시선은 비어 있었다. 나는 기억했다.
그가 법정 복도에서 울음을 억누른 채 걸어가던 뒷모습을. 그때는 피해자의 가족이었다. 지금은 피의자였다. 그 사실은 내가 앉아 있는 이 재판장의 중심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법정이란,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리되는 공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둘의 자리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 블로거 코멘트
이번 회차에서는 판사가 마주한 '기억의 충돌'이 중심입니다.
피해자였던 인물이 어느새 피의자가 되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 장면은 '정의는 고정된 개념인가?'라는 질문을 서사 속에 심어 놓습니다.